[모던 경성]‘과학조선’의 개척자들⑭쉰한살에 다이호쿠(臺北) 의대 유학한 정두현

[모던 경성]‘과학조선’의 개척자들⑭쉰한살에 다이호쿠(臺北) 의대 유학한 정두현

[모던 경성]‘과학조선’의 개척자들⑭쉰한살에 다이호쿠(臺北) 의대 유학한 정두현

Blog Article

정두현은 일제시대 제국대학을 3번이나 졸업한 특이한 경력을 지녔다. 1938년 신사참배문제로 교장으로 재직중인 숭실학교가 문닫자, 세번째 유학을 감행했다. 타이베이제대 의학부로 진학한 것이다. 광복 후 김일성종합대 의학부장을 맡아 북한 의학교육의 주춧돌을 놓았으나 곧 밀려났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평양 항정(港町) 정두현씨는 일즉 동경제국대학 농과를 졸업하고 이래 8,9년간 평양 숭인(崇仁)중학교의 교장으로 시무하여 오던 바 금반 다시 생물학을 연구코저 일본 동북제국대학에 유학하기로 결심하고 지난 22일 밤차로 평양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하였는데, 유학기간은 약3년간이며 숭인학교에서는 조만식씨를 대리교장으로 선임하였다고’(정두현씨 유학, 도미토리
조선일보 1927년 4월28일) 1927년 4월28일 신문에 짤막한 인물 기사가 났다. 평양의 대표적 사립학교인 숭인중학 정두현 교장이 생물학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일본의 대학과정에 유학간다는 소식이었다. 마흔살인 정두현은 명망있는 교육자인데다 평양청년회장까지 지낸 유력인사가 무슨 이유로 유학을 감행했을까. 정두현이 도쿄제대 농대를 졸업한e-모기지
엘리트였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이례적 사건이었다. 정두현은 1936년 평양의 대표적 사학 숭실학교장으로 재직했다.도쿄제대 농학과, 도호쿠제대 생물학과를 나온 엘리트이자 유력한 교육가였다. 하지만 1938년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문을 닫자 세번째 유학을 감행핬다. 전공도광주개인회생
의학으로 바꿔 타이베이 제대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1936년3월26일자 ◇도쿄제대 농대 졸업한 엘리트 평양 출신인 정두현(1887~?)은 대한제국 때인 1907년 일본 유학을 감행한 개명 지식인이었다. 이듬해 메이지학원 보통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춘원 이광수, 호암 문일평도 같농협학자금대출조회
은 학교에서 유학중이었다. 정두현은 관비 유학생 보결시험을 거쳐 1911년 도쿄제대 농대에 들어갔다. 농학실과를 졸업한 1914년부터 2년간 농학교실, 동물학교실에서 연구활동을 했다. ◇3.1운동으로 투옥 1916년 귀국, 평양 광성학교 고등과 교사로 재직하다 1919년 기독교계 사립 숭덕학교 교감을 맡았다.3.1운동 소액대출사업
때 숭덕학교에서 시작한 만세시위를 독려한 혐의로 평양형무소에서 3개월간 고초를 겪었다. 이후 평양청년회장을 맡아 사회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1921년 숭덕학교 교장이 됐고 1923년 숭인학교 교장을 겸임했다. ◇‘평양의 백과전서’ 정두현은 ‘평양의 백과전서’란 별명이 붙을 만큼 박식했다. 영어, 독어, 불어, 일어는 물론개콘 잠시만요
희랍어와 라틴어, 중국어까지 10개 넘는 언어에 능통하다고 소문났다. 평양의 교육계 인사를 소개하는 기사에 이렇게 났다. ‘현 평양 숭인학교장으로 근자에는 동교 승격에 숨은 정열을 많이 고조하는 모양이다. 그 온용정아(溫容靜雅)하며 하검(下儉)하야 원려과묵한 품이 아무래도 여성이라 함이 적합하겠으며 아니 그보다도 고어를 빌려 군자라 함이금융단지 준공식
근사하리라.’ 군자의 인격이라며 치켜세운 뒤 ‘씨는 박학다식하여 평양의 백과전서로 명칭을 듣는 학자로서 어학에 이르러는 일, 독, 영, 불어를 비롯하여 노어, 희어, 랍전어, 중화어, 에쓰어 등 실로 모국어까지 십여어에 긍하야 조예가 또한 깊다’(교육계 공로자, 조선일보 1926년 1월1일)고 썼다. ◇타이베이帝大에 3국민연금 연체료
번째 유학 불혹의 나이에 대학 유학을 감행한 데는 학교 행정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은 데 대한 불만도 있지만 학문에 대한 유별난 열정이 작용했던 듯하다. 1930년 센다이의 도호쿠제대 이학부 생물학과를 졸업한 뒤 평양 숭실전문 교수, 숭실중 교장으로 있다가 1938년 신사참배문제로 학교가 폐교됐을 때도 유학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남들 같으면한국통신요금
초야에 묻힐 생각을 할 쉰한살에 그는 의대 유학을 감행했다. 타이베이 제대(현 국립타이완대) 의학부에 들어간 것이다. 대학원이 아니라 학부에 진학했다. 이 대학 의학부 최초이자 유일한 조선인 유학생이었다. 배움에 대한 욕구가 치열하다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농학, 생물학, 의학으로 시시각각 전공을 바꾸면서 제국대학 3곳을100만원 대출
졸업한 특이한 경력이었다. 해부학과 생리학, 병리학, 세균학, 전염병학부터 소아과학, 이비인후과학 등을 배우면서 1941년12월 졸업했다. 1942년4월 경성제대 의학부에 들어와 내과학교실, 생리학교실에서 연구했다. ◇김일성대 의학부장 맡아 정두현의 경력은 해방 이후 다시 요동친다. 1945년 10월 평양 의학전문학교 교장이 됐다. 30대에 이미 교육가로 이름을 떨친 데다 의학 경력까지 쌓았으니 추대할 만했다. 남쪽에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이 제기될 무렵 북에서도 경쟁적으로 김일성 종합대학이 추진됐다. 의학부 설립을 주도한 정두현은 1946년 10월 출범한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장이 됐다. 북조선 노동당 중앙위원에 이어 1947년 11월 과학계를 대표해 조선임시헌법 제정위원(총 31명)으로도 선임됐다. 김일성 김두봉 같은 권력자들과 나란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소련 학설 반대하다 물러나’ 정두현의 이름은 갑자기 사라졌다. 1951년 이후 행적이 묘연하다. 1952년 북한 과학원이 창립될 때 의학 분야 원사, 후보원사 명단에서 빠졌다. 1986년 조성된 애국열사릉에 의학자 18명 이상이 안치됐지만, 그는 포함되지 않았다. 정두현은 1950년대 고유의 유전자를 부정하고 환경적 변이를 강조한 소비에트 학설을 반대하다 반동으로 몰린 것같다는 증언이 나왔다. 북한에선 1949년 유전학을 반동적 학문으로 몰아 대대적 검열이 이뤄졌는데, 이무렵 뒷전으로 물러났다. 20세기 전반 최고 학부3곳에서 농학에서 생물학, 의학으로 전공을 바꿔가며 연구 경력을 쌓은 정두현은 이렇게 남북에서 모두 잊혀진 인물이 됐다. ◇참고자료 김근배, 이은경, 선유정 편저,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 세로북스, 2024 *다음주 연재는 쉽니다. 조선 뉴스라이브러리 100 바로가기 ※‘기사보기’와 ‘뉴스 라이브러리 바로가기’ 클릭은 조선닷컴에서 가능합니다

Report this page